볼리비아 | 산타크루즈 산훌리안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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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생명사랑나눔운동본부 작성일18-05-07 22:07 조회1,915회 댓글0건본문
볼리비아 산 훌리안에서의 적응기
볼리비아 공항에서 내렸을 때 첫 느낌은 ‘드디어 땅을 밟는 구나!’라는 기쁨이었다. 습하고 더운 공기도 이 기쁨 속에 포함되어 모든 것이 좋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수녀님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이런 것이 선교라니....너무나 들뜨고, 희망적인 시작이었다.
한국에서 출발 후 비행기 안에서만 30시간을 버텨야 올 수 있는 지구 반대편에서의 삶이 이런 행복한 환상으로 시작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다음날부터 시작된 기다림의 시간들 속에서 첫 날의 이 기쁨은 인내하는 것이 그리 힘들지 않게 해주는 활력소와 같은 역할을 한다. ^^
‘빨리빨리’에 깊게 물들어 있던 우리에게 선교사로서의 적응은 기다림으로부터 시작한다. 신분증을 위한 서류 접수를 도와주는 분을 기다림으로 해서 모든 과정이 기다림으로 시작하고, 기다리면 끝이 난다.
지구 반대편이라서 그런가, 사소한 것 몸짓 하나도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생소하고, 뜻밖이지만 신비롭기도 하다. 언어의 표현도 다르고, 몸의 언어도 다른 것을 경험하고 나면 마치 아기가 세상을 경험을 통해 배우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산훌리안에서의 사도직은 길 위에서 시작하고, 그 길을 돌아오는 것으로 마친다. 처음에는 무섭기만 했던 오토바이 택시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느낌은 참 좋다. 대부분의 집들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고, 단층이라서 그런지 넓게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는 느낌은 바다를 보듯이 시원하고, 뻥 뚫리는 기분이 든다.
방문사도직을 주 사목으로 시작된 이곳 공동체에는 3명의 수녀들이 살고 있다. 평일에 2명은 방문사도직을 하고, 1명은 어린이집에 출근한다. 주말에는 2명은 본당의 주일학교를 돕고, 1명은 제의실을 돕는다. 한국에서와는 다르게 수녀들은 본당과는 떨어져서 각자의 사도직을 하면서 본당을 돕는다. 본당의 단체를 맡아서 함께 동반한다든지, 첫영성체나 견진 봉사자들과 동반한다든지...내가 속한 교구(Vicariato Ñuflo de Chavez)는 수도자와 사제의 수가 많지 않고, 친교가 잘 되는 편이다.
방문사도직은 주로 가난한 집이다. 본당에서 추천 받은 곳을 가기도 하고, 지나가다가 어린이들만 있으면 들어가서 어른들은 어디 계시는지 묻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혼자 계시는 곳도 이런 식으로 들어간다.
이곳 사람들은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관대하다. 속 깊은 관계까지 되는 것에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누구든지 지나가다가 집으로 들어가거나 길을 물으면 친절하게 대답하고, 환영한다. 대부분의 집에 대문이나 담이 없어서 집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기 때문에 지나가다가 들어가는 것이 어렵지는 않다.
주로 아이들은 잘 접해보지 않은 동양 수녀들이 자신들에게 말을 거는 것이 신기한지 쑥스러워하면서도 인사를 잘 한다. 먼저 살았던 수녀님들이 일궈 놓은 환경이겠지만 어디든 지나가면 아이들이 수녀님~~~(Hermana!)하고 부르는 것을 쉽게 들을 수 있다. 아이들은 우리가 답할 때까지 부른다. 그리고 달려와서 서로 포옹하거나 악수를 하고 돌아가곤 한다. 아이들과 포옹하고 나면 어떨때는 하얀 머리수건에 아이들의 손자국이 남거나, 아이들의 콧물이 옷에 묻어 있기도 한다.
이곳은 길 포장이 잘 되어 있지 않다. 요즘에는 큰 길에는 조금씩 포장을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이 흙길인데 비가 오면 진흙탕이 되어서 다니기가 쉽지 않다. 비 오면 진흙이고, 마르면 딱딱해지는 땅이라 다니는 길에 돌을 많이 깔아 놓았다. 그래서 걸어다니는 것이 어렵다. 처음에는 발이 부르트고, 발 바닥이 아프니 피곤도 빨리 다가오고... 그런데 이런 길을 아이들은 맨발로 다닌다. 어릴 때부터 습관이 들어서 그런지 맨발로 잘도 뛰어 다닌다.
아이들은 집 마당에서 놀거나, 길에서 뛰어다니면서 지낸다. 학교 수업은 대부분 한나절만 한다. 한국 학생들은 꿈도 꾸지 못할 만큼 여유기 많다. 대부분의 학교는 초등학교 6년과 중고등학교 6년이 오전 오후로 나누어서 있다. 즉 오전엔 중고등학교, 오후엔 초등학교가 되는 것이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집에 와서 집안일을 하거나, 숙제를 하고, 친구들과 논다. 학원이나 방가 후 프로그램 등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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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방문하는 지역의 초등학생들은 대부분 오후에 학교에 간다. 오전에 숙제를 하거나 집안일을 돕고, 오후 1시에 학교에 갔다가 6시쯤 돌아온다. 중고등학생들은 오전에 7시에 가서 12시쯤 마친다. 방과 후에는 대부분 집에서 동생들을 돌보거나 부모님이 장사하는 곳에서 부모님을 돕기도 한다.
이곳에서 아이들이 장사를 하고, 청소년들이 시장에서 판매원으로 아르바이트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아빠가 잔디 깎는 일을 하면 아들은 아빠를 도와 잔디 깎는 것이 당연하고, 엄마가 채소를 팔면 방과 후에 채소 파는 일을 돕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인지 이곳에 아이들은 9-10살만 되어도 장사를 어른처럼 능숙하게 한다.
부모님이 여유가 있는 아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집 마당이나 공터에서 논다. 페스트푸드점, 아이스크림 집 대신에 길거리 시장에서 식사나 음료수를 파는 곳이 많다. 집에서 식사 준비를 하려면 기본적인 양념이나 가스 등이 필요하므로 어떤 때는 밥 한그릇 사먹는 것이 나을 때가 있기에 이곳에는 항상 사람들이 많다. 이곳에도 컴퓨터 몇 대를 놓은 게임방이 있다. 아이들은 이곳을 좋아한다. 약간이라도 돈이 생기면 이곳에 가서 죽치고 있곤 한다. 약간의 행운이 있는 아이들은 스마트 폰으로 페이스 북을 하거나 게임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도 하지만….
이곳에서 만난 한 가족을 소개하고 싶다. 우리는 이 가족을 ‘Benigna네 식구들’이라고 부른다. (엄마이름이 Benigna이기 때문이다. )
Benigna씨는 중풍환자이다. 7-8년 전쯤 남편이 집을 나간 후 충격으로 쓰려졌고, 혼자 걷는 것도, 손을 사용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불편한 상태이다. 당시 큰아들(7세), 작은아들(6세), 막내 딸(4세)였다. 집은 나무 움막 한 채이고, 방 한 칸에 침대 한 개와 불을 피울 수 있는 곳이 함께 들어 있고, 비가 오면 집 마당은 호수가 되어버리는 상황이었다.
이웃집에 방문 갔다가 소개로 만나게 된 이들의 모습은 마음이 많이 아프게 했다. 어머니가 아이들의 도움 없이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말도 잘 못하는 상황이라 우리가 알아듣는 것도 어려운 지경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방문하고, 아이들을 씻겨주고, 가끔 쌀이나 야채를 가져다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다였다. 그나마도 비가 오면 길 상태가 나쁘기 때문에 방문하는 것이 쉽지 않기에 다닐 수가 없고, 비 온 후에 방문하면 온 집안이 젖어 있고, 마당에도 물이 고여 있어 모기가 바글거리는 상황이 계속 되었다. 이곳은 하수도, 정화조 시설이 거의 없기 때문에 비가 와서 물이 고이면 냄새도 많이 나고, 금방 녹조가 끼고 썩는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서 물이 빠지길 기다리는 방법 밖에 다른 길은 없다.
가장이 떠난 가정은 기본적은 먹거리에서 부터 도움의 손길이 필요했고, 다행히 좋은 이웃들이 있어서 도와주기도 하고, 아이들에게 일거리도 주기도 했다. 큰 아들은 8살부터 엄마를 목욕시키고, 집안일을 하고, 동생들을 돌보며 지냈다. 주면에서 일거리를 주면 그 일 하는 것도 큰 아들의 몫이고, 어린 가장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염소나 양, 소 같은 동물을 돌보는 일이 대부분이다. 일을 마치면 음식이나 고기, 과일 야채 등을 얻어 와서 생계를 이어갔다.
2-3년 전쯤 이 마을에 비가 많이 와서 홍수가 났다. 시간이 지나서 다른 곳은 물이 어느 정도 빠졌지만, 베니그나씨 집은 지대가 더 낮아서 인지 물에 더 오래 잠겨있어서 이웃의 짓다말은 빈집에서 한 달 정도 지냈다. 다행히 물은 빠졌지만 낡은 나무집이라서 나무가 썩어가기 시작했기에 무엇인가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우리가 방문하면서 우선 지대를 높이는 일부터 시작했다. 시청이나 도움을 줄만한 이들을 찾아 다니며 도움을 청했지만 처음에는 거절도 많이 받았다. 본당 신부님께도 알리고, 신자들에게 도움을 청했고, 다시 시청에 도움을 청해서 집 지어주는 프로그램과 연결이 되었다. 시청에서 집지을 자재와 인건비를 대주었고, 이것을 맡은 직원들이 이집의 딱한 사정으로 보고 가구와 주방기기 등을 마련해 주었다.
시간도 어느 덧 7-8년이 지나서 이젠 두 아들이 가장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엄마를 돌보는 일은 딸의 몫이 되었다. 집 공사를 하면서 마당에 흙을 부어 지대를 높였기 때문에 이젠 비가와도 물이 차지 않는다. 나무집이라 물이 새던 곳에서 이젠 방 두칸에 목욕실, 주방이 따로 있는 곳에서 생활한다.
하지만 여전히 어머니의 중풍은 나아지지 않고, 아이들이 어리기 때문에 생활하는 것이 쉽진 않다. 아이들이 크면서 필요한 학용품을 대는 것도 쉽진 않고....
이들과의 우리의 만남은 서로에게 배워가는 관계이다. 아이들은 살아가면서 그저 받기만 하지 않고, 자신들도 줄 수 있는 삶임을 배워가고, 우리들은 이들과 만남에서 해외선교의 삶을 배운다. 기업의 사장은 아니어도 이들에게 우리는 갑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의 삶을 늘 돌아보게 한다.
이제 13살, 12살 된 아이들이 가장 소망하는 것은 자전거이다. 10살 딸은 예쁜 옷에 구두를 신고 큰 인형을 갖고 싶어 한다. 엄마가 아닌 친구들과 함께 축구하고, 자전거를 타고 실컷 달려보길 원한다. 옆 집 친구에게 큰 인형을 갖고 자랑하고 싶어 한다. 이런 아이들에게 이런 꿈을 들어줄 수는 없지만 Benigna씨네 식구들과 함께 하면서 우리의 선교 삶도 자리 잡아가는 것 이것이 이곳에서의 우리의 삶이다